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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내일도 선하시다
by Marshall Segal
2020-06-28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1–2, 8).다윗이 이 글을 썼을 때 그를 둘러싼 환경은 좋지 않았다(삼상 19). 축복에 잠겨서 마냥 행복할 때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외쳤다. 어떤 일이 닥쳐도, 아무리 인생이 힘들어져도, 누가 자신을 배반하고 또는 공격을 해도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라고 고백하기로 다윗은 결심했다. 모든 것이 다 안 좋을 때다윗은 아직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쫓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 왕은 다윗을 향한 분노와 질투로 눈이 멀어 있었다.) 군중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외칠 때, 사울의 피는 끓었고 그는 이새의 사랑스런 아들을 죽이겠다는 열망에 불타올랐다.사울은 사람들을 보내 다윗을 죽이도록 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다윗을 사랑했고(삼상 19:1), 분노에 사로잡힌 사울은 스스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다(삼상 19:10). 다윗은 아슬아슬하게 그 창을 피해 도망갔다.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적으로만 충분하지 않았던지 다윗은 이스라엘 근방에 있는 가드의 왕 아기스 영역으로 들어갔고, 그는 다윗을 보자마자 그를 향한 질투와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 생명을 보존해야만 했고, 그 결과 그들은 다윗을 놓아주었다. 자기를 증오하는 곳을 떠나 다시 반대와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돌아가면서 다윗이 외친 말이 이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위험한 가운데 주님에게로 피하는 것이 그가 없는 안락함과 안전보다 훨씬 더 낫다.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다윗은 가드의 아기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제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의 은혜와 환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도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라고 고백하는 다윗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윗, 당신은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는가? 다윗이 가드에서 도망나온 이후, 사울은 다윗 때문에 놉에 있는 모든 제사장을 죽였다(삼상 22:18).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광야로 내몰았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삼상 23:15). 결국 다윗은 다시 가드로 돌아가야만 했다(삼상 27:2). 가드는 얼마동안은 다윗을 받아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고 다시 내쫓았다(삼상 29:11). 그리고 다윗의 가족과 친구가 급습을 받아 붙잡혔다(삼상 30:2). 또한 다윗의 백성들이 마음을 돌려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삼상 30:6). 하나님은 다윗이 두려워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를 구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루하루 그를 구했다. 비록 내일 만날 고난이 기쁨과 감사로 향하는 그의 마음 문을 막을지라도, 은혜로우신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오늘 하루의 구원하심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다. 오늘 하루의 승리와 오늘 하루의 자비하심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다. 오늘 하루 충분한 은혜시편 34편은 약하고 상처받았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 지은 시다. 모든 지혜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예배하라. 이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는 하나님, 그의 자녀가 그날 하루 먹을 양식을 책임지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에게로 피하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스트레스와 실망 그리고 두려움이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우리의 기쁨을 잠식시킬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윗 왕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매일 아침 만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자비하심에도 불구하고(애 3:22-23),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내일 만날 환난에 휩싸인다. 그런 우리에게 다윗은 하나의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확실성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그날 만날 은혜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바라볼 때 생기는 평화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던 자기처럼 되라고, 지금 다윗은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위대한 아버지이자 왕인 하나님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사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키고, 우리를 온전히 또 영원히 그와 함께 만족함을 누리면서 살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고통, 우리 앞에 닥친 장애를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인지 또한 우리에게 지금 당장 무엇이 필요한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모든 순간순간이 항상 안전하고, 고통이 없으며 형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선함이 언제나 선함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고난 중에 하나님 안으로 피할 때, 당신은 보다 더 생생하고 심도있게 그의 선하심과 보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단지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오늘 하루 당신을 사랑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식에 집중하도록 하라. 그가 참으로 선하시다는 것을 보고 느끼도록 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 미래에 완벽한 은혜를 가져다줄 하나님을 신뢰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Be Good Again Tomorrow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
선하심
다윗
시편34편
고난
완벽한은혜
자비하심
폭풍 중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
by Neil C. Stewart
2020-05-17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내면 깊이 고통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안전함을 바라는 갈망이 있다. 우리 인간은 낙원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지 결코 바이러스, 박테리아,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각종 병으로 고통 받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좋아하든지 아니면 참아내든지 간에,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고 인생이라는 게임이 시작되면 사냥이 시작되는데, 확률은 결코 인간 편이 아니다. 각종 건강 보험 그리고 의학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은 전 세계에 걸쳐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다. 한 사람에게는 한 번의 죽음이 찾아온다. 영원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영혼에게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통계다. “아마도 내일, 내일 죽을 지는 모르지. 하지만 내가 오늘 죽을 리는 없어. 어떤 경우라도 가장 끔찍한 두려움이 현실로 닥치는 경우는 드물어. 겉으로 보기 보다 현실은 그나마 괜찮은 경우가 많지 않아? 게다가 난 아직 상대적으로 젊고 몸 상태도 괜찮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한다. 상황이 좋을 때만 곁에 있는 친구처럼. 그러나 이런 생각은 힘든 상황이 실제로 닥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음악이 멈추고 바닥이 내려 앉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바로 그런 순간을 맞았을 때 우리가 불러야 할 많은 노래를 주셨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믿음을 노래하는 오래된 많은 노래 중에서도 시편 46편을 따라갈 노래는 없다. 많은 시간을 거쳐서 이 찬송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죽음, 귀신 그리고 어둠에 고통받은 수많은 영혼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코로나19의 열병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이 전염병이라는 폭풍우 속에서도 당신이 편히 머리를 뉘고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베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편 46편은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산들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는 바로 그 산들이 지금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시46:2–3). 소용돌이를 한번 상상해 보라. 세상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도, 인간이 겪은 그 어떤 경험도 이것 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이런 시간을 만나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두려움에 함몰되지 말라“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시 46:1–2). 시편 저자의 자신감은 다름 아닌 그의 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히브리어의 배열을 고려할 때, 시편 46편 가장 처음에 나오는 두 단어에 비밀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이 생각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도록 하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편이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당신을 돕는다. 그 분이 가진 모든 지혜, 능력, 거룩함, 공의, 선함 그리고 진리가 다 당신을 돕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온전하심을 동원하여 당신의 편에 서서 당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시편 저자는 지금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세 가지 독특한 측면을 규명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달려갈 수 있는 분이 되심으로 우리를 돕는다(피난처). 2. 하나님은 우리보다 강한 분이시기에 우리를 돕는다(능력). 3. 하나님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를 돕는다. 말 그대로 그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된다(시 46:1).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어떤 환난을 가져다주든지, 기독교인이라면 그 어려움을 결코 혼자 맞지 않는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 위험이 더 가까울수록, 우리의 목자는 더 가까이 있다.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바로 그 분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슬픔에 함몰되지 말라두 번째 구절에서 시편 저자는 우리를 시온산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라. 산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었는지 기억하라. 누구라도 패닉 상태가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땅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사방의 벽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사방팔방으로 뛰고 어미들은 멀리 도망가기 위해서 아이들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도시의 분위기는 패닉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평화롭고 기쁨에 차 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4–5).시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는 곳이다(시 46:4-5). 시온에 사는 성도들은 특별한 부류다. 그들은 가장 끔찍한 재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무엇인지 안다. 그건 그들이 생각이 없거나 고통에 무감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하나 없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침착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들을 안전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 하나님은 구약 속 인물들이나 우리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도 또는 동 트기 직전이라도, 우리가 적의 공격을 받아 가장 약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시 46:5).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다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한마디만 하면 온 세상은 바로 녹는다(시 46:6). 하나님에 대항해서 일어난 세상 나라들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그 임재의 가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다 열려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그 가치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신비한 요정처럼 감추어 놓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야곱, 선천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또 방황하고 또 잘 속이는 그런 야곱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신다(시 46:7).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도 손을 뻗는(물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전)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가 당신을 돕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라힘든 시대를 맞아 고통이 점점 더 커질 때, 우리는 작은 나무만을 보느라 큰 그림을 놓치기 쉽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다 집어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연민과 같은 감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에 빠졌을 때 가장 쉽게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점도 다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는 고통받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눈을 높이 들라고 말씀하신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시 46:8). 하나님은 역사의 장면 뒤에서 일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보기 원하신다. 그는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을 상대로 일으키는 오만한 반란을 제압하시고(시 46:9; cf. 시 2), 또 그의 이름을 이 땅에서 높이시며(시 46:10),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신다(시 46:11).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예술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이 명령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를 잘못 인도해왔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버몬트 주에서 있었던 어느 눈 덮인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다. 차 뒷자리에서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 이성, 친절함, 그리고 사랑은 이미 차창 밖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이들의 머리에 든 생각이라고는 자기들의 영역을 지키겠다는 것, 어떤 경우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게 다였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친절하지만 엄하게 말한다. “조용히 해!” 바로 이 동사가 지금 시편 저자가 쓴 단어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백성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바로 이런 실수야말로 재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가장 잘 저지르는 게 아니던가? 그 재난이 아픈 자녀든, 비정상적인 병원 검사 결과든, 추락하는 시장이든 아니면 무섭게 다가오는 감염병의 위협이든지 간에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작은 것에 연연하는 바람에 큰 그림을 놓치고, 이 모든 어려움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곤 하는가? 로얄벨파스트 어린이병원(Royal Belfast Hospital for Sick Children)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던 때에 나는 아픈 자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많은 부모를 만났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참으로 종종 하나님은 영적 거인을 병원에 보내주셨다. 그런 영적 거인은 대부분의 경우 낭포성 섬유증과 같은 만성적이고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부모였다. 그들은 오랜시간 실망을 통해서 훈련을 받았기에 사실 그리 심각하지 않은 병 때문에 병원에 온 부모가 결코 얻지 못하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또한 위기를 겪으면서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그런 고통의 강을 건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고통과는 비교도 안되는, 풍성하고 진정한 실재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위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를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자녀가 은혜 속에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 구세주를 증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환난”(시 46:1) 속에서 살아갈 때, 나는 온 세상의 선한 것과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이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이런 환난 속에서도 결국은 모든 것이 다 그분의 영광을 향한 역사의 금빛 수를 놓는 과정임을 볼 수 있는 용기와 기쁨으로 가득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길 기도한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수없이 반복했듯이, “하늘에” 보좌가 서 있다(계 4:2).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다 주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아시고 또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다 아신다(시 103:14), 그리고 그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히 2:11). 마리아의 아들은 인간의 약함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약함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히 4:15). 팬토크레이터(Pantokrator), 즉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다 그의 손에 모으고, 그 모든 것이 다 그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 기독교인이여, 오늘밤 베개에 편히 머리를 누이고 쉬도록 하라. 그 어떠한 폭풍이 불어도 당신은 영혼의 평화를 주는 쉼터를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Psalm 46: God, Our Storm Shelter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망
시편46편
피난처
두려움
진정한위로
환난
팬토크레이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연약함을 고친다
by Clarissa Moll
2020-05-03
몇 년 전, 우리가 첫 대륙 횡단 여행을 가기 전에, 남편과 나는 야외 활동 용품점에서 데이트를 했다. 그는 나에게 여행용 배낭을 사주고 싶어했다. 우리는 미 서부를 가로질러 옐로스톤,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그리고 로키 산맥을 지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등산을 하게 될 나를 위해 복장과 장비를 갖추어 주며 즐거워했다.열정적인 등산가였던 그는 배낭 코너를 활보했고, 가장 큰 것 하나를 신나서 꺼내 들었다. “이거 정말 멋진데!” 그가 소리쳤다. “한번 메어 봐!”난 거대한 짙은 황록색 가방을 둘러메고서 몇몇 옷 선반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연습했다. 어깨 끈은 어깨에 꼭 맞았고 허리 벨트도 내 허리를 편안하게 받쳐 주었다. 사이즈가 약간 과해 보이는 면이 있었지만,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고 한번 사용해 볼만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볍게 여행하기로 계획했고, 배낭 하나만 챙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처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직원이 거리를 두고서 정중히 물었다. “무게를 늘려 보시겠습니까?”우리가 서서 지켜보는 동안, 직원은 배낭에 모래 주머니를 넣기 시작했다. 배낭은 점점 무거워졌고 남편은 미소를 띄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산을 오르고 있는 모습을 예상했다. 하지만 직원이 그 배낭을 내 등에 올려 주었을 때, 나는 등산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똑바로 서 보려고 했지만 계속 휘청거렸다. 내 어깨에 가중되는 짐의 무게 때문에 불안정하게 구부리고 있는 나를 남편이 잡아주었다. 그는 “한번 조금씩 걸어 다녀봐. 곧 익숙해질 거야”라고 격려해 주었다.나는 배낭을 엉덩이 쪽으로 더 옮겨 메고 몸을 앞쪽으로 기울인 채로 옷 선반 주변을 걸어 다녀 보았다. 이번에는 고작 몇 걸음 정도만 가고는 멈추었다. 그것은 너무 무거웠고 결국 “도저히 못하겠어요”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짊어진 것들요즘 내가 지고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내 짐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다고 자주 느끼곤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뉴스를 강타하기 전부터 내가 짊어진 짐들은 가볍지 않았다. 8개월 전, 남편은 등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육아, 일 그리고 비통함은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해 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그리고, 최근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나는 지금 식료품이 부족하고 사회적 관계가 거의 없는 자가격리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추가로 일을 하려고 알아보던 중에 며칠 앞서 전달된 공지사항으로 인해 자녀들을 풀타임으로 홈스쿨링 하고 있다.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격리에 대한 좌절감, 무너진 세상을 향한 의분으로 가득하다.이 모든 것들과 그 이상의 것들은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위협하는 매우 힘든 짐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운다. 솔직히 나는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도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상황이 힘들어지면 강한 사람은 더 강해진다”는 말 때문에라도 스스로 용기를 북돋으며, 입술을 악물고, 어깨에 짐을 짊어진 채로 내 인생의 진열장 주변을 거닐어 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나는 어려운 시기가 우리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실제 가치롭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통과한 것 때문에 얻어지는 수용의 가치, 사랑의 가치, 상급의 가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메시지를 찾을 수 없다.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보고 무거운 돌을 어깨에 지라고 하시거나 내가 짊어진 짐의 고통을 강제로 이겨내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 어디에서도 가장 무거운 짐 운반을 목표로 하여 전력을 다하라고 하지 않는다. 당신의 짐을 쉼으로 바꾸라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나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라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짊어진 분노, 좌절, 슬픔 그리고 걱정의 무게를 인정하라고 하신다! 지금 내게 결핍된 자유, 유연함, 특권과 지위의 상실에 대해 애통해 하도록 말이다! 이렇게 보기 흉한 짐을 짊어지겠다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며 그분의 발 앞에 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도록 주님은 나를 부르신다. 만약 내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쉼을 찾아야 한다면, 이곳이 바로 그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내가 내 짐을 지겠다는 생각을 벗어버려야 하며, 예수님의 더 쉬운 멍에가 내게도 필요하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유독 힘들었던 청년시절 동안,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한 현명한 친구는 내 손으로 직접 기도할 수 있도록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신앙을 보다 외적으로 표현하는 교회에서 성장했으며 손을 사용해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언제나 손을 모으고 갖추어진 자세로 의심할 나위없이 새끼손가락 조차 움직이지 않고 기도했다. 우리가 같이 기도할 때 그녀가 엿보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주로 모은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그녀는 손을 무릎 위에 펴고 기도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열린 자세는 그녀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풀어 놓도록 일깨우는 것 같았다. 기도 중에 간구함을 아뢸 때,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위로하고 손을 들고서 마치 자신의 필요를 실제로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처럼 하였다. 아름답게 몸으로 구현된 그녀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생각과 의지로 더 잘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윗이 사울의 무거운 갑옷을 벗어 돌려 주었던 것처럼, 나의 사랑하는 친구는 자기 홀로 짊어지고 갈수도 있었던 무거운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내려 놓았다. 더 이상 그녀가 짊어질 가식이나, 슬픈 포기, 수치 따위는 없었다. 오직 평안 뿐이었다. 그녀는 짐을 내려 놓으며 자신의 영혼을 위한 참된 쉼을 찾게 되었다.요즘에는 분명하게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나의 활동을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다하게 하고 있다. 매일 나를 따라오는 감정과 관심을 마법처럼 지워낼 수도 없다. 하지만 내 통제를 벗어난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이것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매우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내가 다 책임지려고 했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는 있다. 손을 들고 기도하며, 탄식, 슬픔, 불안과 지침 그리고 나의 모든 짐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에 기대어 주님이 주시는 쉬운 멍에를 택할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rading Your Weakness for God’s Strength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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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소명
신앙인으로 기꺼이 불편해지기
by 김돈영
2020-04-25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입대를 축하합니다”현수막이 걸린 위병소를 지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새롭고 불편해진다’. 자고 일어나는 것,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 등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던 것, 일상적인 일들도 배워야 한다. 심지어 말하는 것과 쉬는 것까지도 새롭게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 이제 민간인과 구별되는 군인이 된 것이다.처음 교회에 가면 많은 것이 낯설다. 예배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도 호칭이나 물건의 이름, 용어들도 다르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처럼 많은 부분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에서 너무나 자주 듣는 말이다. 거룩한 땅(출 3:5), 거룩한 모임인 성회(출 12:16), 거룩한 안식일(출 12:23), 거룩한 민족(출 19:6), 거룩한 장소인 성소(출 29:31) 등 많은 것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의 소유는 모두 거룩하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인정한다면 나 또한 거룩한 것이다. 나의 어떤 능력이나 노력,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신분이 바뀐 것이다. 거룩한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방향을 잡았는가?지금껏 해온 일상적인 생활도 군인이 되면 새롭게 배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모든 생활의 방향성,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군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누구나 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군인이 하는 모든 행동은 나라를 지키는 것, 즉 전투력과 관련되어 있다. 훈련하거나 장비를 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축구나 족구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운동이 아니다. ‘전투 체육’이라 부른다. 운동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통하여 체력을 기르고 전우애를 다지는 것이다. 운동은 전투력 향상을 위한 도구이자 방법일 뿐이다. 밥을 먹는 것도 그렇다. 군대에서는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굶을 수 없다. 전투력에 지장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은 전투력, 더 나아가 국방력과 연관되어 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다르게 말하면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은 참으로 추상적으로 들린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인식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스림을 받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좀 더 압축하면 율법이다. 거룩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별되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인 것이다. 주를 위한 것은 무엇인가?“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삶의 방향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주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사실 좀 머뭇거린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은 알겠지만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명령, 곧 통치하시는 법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명령과 율법의 핵심, 법이 말하는 방향성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안경을 주고 있다. 즉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직장 동료와 부하직원은 승진을 위한 발판이 아니다. 전도하는 이유와 전도 왕이 되려는 목적도 달라져야 한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 운동하고, 여행하는 것, 심지어 밥을 먹는 것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병사의 모든 일상이 전투력 향상과 관련된 것처럼 말이다. 구별된 것은 드러난다구별된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드러난다. 말투와 행동, 생각하는 방향 등 독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휴가 중에 있는 군인이 사복을 입고 다닌다고 해도, 짧은 머리를 감추려고 모자를 썼다고 해도 우리는 알아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금방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그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 군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외모가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군인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냐면 모두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데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친구들 사이에서, 학교나 모임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조금만 속이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고 손해나는 편을 선택할 수 있는가? 하기 싫은 뒷정리나 청소,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일, 드러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할 수 있는가?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구별된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거룩한 것, 익숙한 것과 싸움거룩하다는 것, 구별된다는 것은 날마다 익숙한 것과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는 입대 하기 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았던 생활에 익숙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내 기준에 맞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하다. 무엇을 배울 필요도 없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탈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늘 신경 쓰고 긴장해야 한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거나 긴장이 풀어지면 나도 모르게 예전의 습관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긴장의 끈을 놓치면 대대장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초유의 사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을 써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자꾸 되뇌어야 한다. 날마다 자신의 내면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기준을 버리고,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질지라도, 구별된 사람으로서 말씀의 옷을 입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마 16:24)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했다. 거룩함에 참여하다우리는 왜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히 12:10)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것이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누군가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하나님은 어떻겠는가? 사업이 부도 나는 순간에,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순간에, 몸이 아파 누워있어야 하는 순간에, 밀린 공과금과 부족한 생활비를 걱정하는 순간에, 그리고 요즘 같이 어지러운 팬데믹 상황에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 계시겠는가?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하면 무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밥을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행정보급관이 필요한 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한다.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행정보급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정보급관 밑에 있는 것보다 더 불안하고 염려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구별된 사람,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자. 불안해하지 말고 내 방법을 찾지 말자. 우리에게 있는 문제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이 내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빅픽처’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주인이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된다. 그것이 최선이다. 불편함이 익숙해지다구별되어 불편한 삶,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다. 세상과 구별된 삶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다른 방향을 가는 이 세상에 익숙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룩한 모습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완성되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한 죄의 찌꺼기가 항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비워가는 것이다. 내 몸에 쌓여 있는 죄, 하나님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악한 본성의 찌꺼기를 하나씩 벗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때 완전하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을 회복하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평생 불편해야 한다. 불편한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불편한 것이 편하게 느껴져야 한다. 그것이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거룩한 삶일 것이다.불편함을 편하게 생각하자!
영성
신앙과소명
거룩
사도바울
자기부인
불편
구별
군생활
그리스도인의 재택근무
by Joe Holland
2020-04-13
코로나19와 관련한 뉴스와 질병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기업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권고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많은 근로자에게 처음 있는 일이다. 재택근무 경험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은 실로 큰 변화이다. 이런 변화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재택 근무자들을 보면서, 지난 6년간 재택근무를 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재택근무를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정직하라(Pursue Integrity)첫 번째로 재택근무는 정직을 요구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정직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방식으로 근무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택근무가 지난 몇 년간 좋지 않은 이미지를 준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여러 산업 분야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 중에는 아예 일하지 않거나, 고작해야 일주일에 몇 시간만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재택근무를 성실하게 하려는 사람에게도 게으름은 정말로 심각한 유혹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사회적 책임감은 재택근무에 해당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당신이 근무 중에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쇼핑, 혹은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다면 당신의 동료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동료와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고 일하는 것은 모두가 공유된 직업윤리를 만들어가도록 한다. 열심히 일하는 옆자리의 동료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열심히 일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은 재택근무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를 더 강화할 수 있다. 우리는 상사가 보지 않더라도, 또 급여 수준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무리 재택근무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정직하게 일을 할 수 있다. 비록 일터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직이라는 한 단어만 제대로 기억한다면 재택근무는 우리에게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얼굴과 대면하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재택근무 환경과 관계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정직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기억하면서 재택근무에 필요한 몇 가지 실질적인 조언을 살펴보도록 하자. 시간을 배분하라재택근무와 관련한 오해 중 하나는 출근해서 겪어야 하는 갖가지 잡무 등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집에서 근무하면 정말로 더 높은 생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다. 우리 속에 엉겅퀴와 쓴 뿌리를 여전히 남겨놓은 인간의 타락은 지금도 여전히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를 저주하고 있다. 출근하는 사람이든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집중 근무와 관련한 가장 뛰어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60분에서 90분 정도까지만 집중할 수 있다. 그 후에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 식의 집중은 하루에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 여유를 주어야 하고,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 이메일 응답이나 파일 시스템 정리와 같은 단순 작업에 필요한 시간도 적절하게 배분할 필요가 있다. 전화를 하라재택근무라고 하면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얼굴을 보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대부분의 작업 공간이 디지털화되어 있기에 근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이나 다른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과도 커뮤니케이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지 직접 만나서 대화하지 않을 뿐이다. 애질 앤 린 방법론(Agile and Lean methodologies, 역자 주: 낭비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경영 기법의 하나)과 같은 효율적인 프로젝트 관리 모델에 따르면,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 팀일수록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횟수가 더 많다고 한다. 재택 근무자도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질문이 있거나 전달할 정보가 있는 경우라면, 언제라도 전화기를 들거나 화상 회의를 할 수 있다. 그런 시간을 더 자주 가질수록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근무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지구촌을 휩쓰는 전염병 때문에 우리가 더 자주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그건 참으로 근사한 일이 아닌가? 상사의 기대 수준을 알라전 세계적인 전염병 사태를 맞아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재택근무를 할 것으로 예측하고 준비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현실을 맞았다. 모든 사람의 근무 환경은 다 다르다. 급여와 관계없이 많은 근로자가 재택근무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상사가 기대하는 재택근무의 수준과 관련해서 최대한 솔직하고 열린 대화를 가져야 한다. 상사는 내가 어떤 시간대에 대기하고 있기를 원하는지? 전화, 이메일 또는 채팅 등의 방법 중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답하기를 원하는지? 화상 회의를 하는 경우 복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런 모든 사항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의논해야 하고,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당신만의 워터쿨러(watercooler) 공간을 찾으라워터쿨러(역자 주: ‘워터쿨러 효과’에서 나온 단어. 워터쿨러 효과란 사무실에 비치된 물 등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에서 직원들이 모여 대화함으로 사내 의사소통이 더 활발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워터쿨러는 이제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비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는 상징적인 위치가 되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도 중간중간 쉬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워터쿨러 공간이 필요하다. 전염병 상황을 맞아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자가격리 상태에 들어가 있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우리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워터쿨러 공간을 갖게 되었다는 일종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 독신자나 가족과 떨어진 공간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의 전화 통화가 워터쿨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람에도 우선순위를 정해 놓으라새로운 업무나 바뀐 업무는 보통 이메일을 통해서 전달된다. 지금과 같이 복잡한 환경에서는 굳이 전 세계적인 위기가 아니더라도 매일 매일 처리해야 하는 이메일과 메시지는 상당한 수준이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진짜 중요한 메일이나 메시지와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모든 메시지와 이메일에 설정된 도착 알람부터 해제해야 한다.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는 대상을 선별해서 알람을 별도로 설정해야 한다. 알람에도 우선순위를 정함으로 우리는 좀 더 집중해서 일할 수 있다. 알람에 의해 방해를 받더라도 그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확인하여 업무 효율을 놓일 수 있다.아날로그로 일하라디지털 연결이 없으면 아예 불가능한 게 재택근무지만 우리는 여전히 펜과 종이를 사용해서 일할 수 있다. 특히 알람에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경우에 더 그렇다. 아날로그로 일하는 것은 주의를 산만하지 않게 하고 불안감도 줄여준다. 특히 지금과 같이 전 세계적인 위기를 맞아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상황을 보도하는 뉴스에 중독되어 긴장감을 떨치기 어려운 상황일수록 아날로그로 일하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출퇴근(Commute)을 만들라나의 출퇴근 거리는 우리 집 1층에서 지하실 사무실까지 가는 열네 발자국이다. 퇴근할 때 교통 체증이 없는 건 너무도 확실하지만, 십 초 동안 단 열네 발자국을 걷는 일터에서 집으로의 전환은 그리 쉽지 않은 변화이다. 재택근무자에게 집과 직장은 같은 장소이다. 따라서 출퇴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상의 출퇴근 루트를 만들고, 최소한 5분이라도 퇴근 직전에 수행하는 업무정리 등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 놓으면 그건 매우 건강한 습관이 될 수 있다. 하루의 업무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여 다음 날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하루 동안 채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에 대해서 기록해 놓으라. 그리고 퇴근과 동시에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이 직장 외에 주신 다른 우선순위들, 가정, 건강 그리고 개인적인 삶으로 돌려야 한다. 하루 동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퇴근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주님을 계속 섬길 힘과 바른 방향성을 달라고 기도하자. 떨어져 일하는 친구와 대화하라재택근무와 관련한 좋은 내용을 게시물 하나에 다 실을 수는 없다.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재택근무를 더 잘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재택근무를 하던 믿을 수 있는 친구 또는 동료를 찾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일할 때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전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이제 완전히 새로운 근무 환경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택근무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할 것인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여전히 재택근무라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king Remotely to the Glory of God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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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라
by Jon Bloom
2020-03-23
열한 명의 제자가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지상명령을 받은 순간에도, 마태는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7)라고 전한다. 몇몇 제자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의심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놀랍지만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의심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형제자매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심”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디스타조)는 흔들리며 주저하는 불확실성, 즉 일반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몇몇 제자들을 흔들리게 했는가? 마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주의 자비라고 생각한다. 의심하는 사람의 의심하는 내용은 그들의 경험과 기질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만난 낯선 만남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한 일과는 전혀 달랐다. 기존의 모든 개념과 충돌하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할 것이다. 의심하는 제자들학자들 사이에서 열한 명의 제자가 의심했는지 아니면 제자들과 동반한 사람 중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성경 본문은 열한 명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의심은 부활하신 그날과 그날 이후에도 열한 명의 제자들과 더 많은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우리는 도마가 예수님을 직접 보기 전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다(요 20:25-29). 열한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을 믿기 어려워한 사실을 알고 있다(눅 24:36-43). 우리는 또한 더 많은 제자가 그들이 들은 부활의 소식을 의심했던 것을 알고 있다(눅 24:13-34).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은 예수님 제자들의 몇몇은 직접 보고 들은 놀라운 것들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본 것과 들은 것, 경험한 것이 모두 사실일까 하고 의심하는 것, 흔들리고 주저하는 불확실성을 경험하는 것은 놀라울 만큼 특별한 일이 아니다.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형제, 유다가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라고 쓴 것에 매우 감사한다유다의 자비짧은 유다서는 주로 거짓 선생에 대한 냉철한 경고이다. 요한의 편지나 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와 히브리서처럼 유다는 우리가 왜곡된 복음과 복음으로부터 떠나는 것의 심각성을 느끼고 신실함으로 인내하기를 바랐다.맺음말에서 그는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라고 말한다. 유다는 의심이라는 말을 그리스 단어(디이아 크리노)를 사용하는데, 이는 흔들리는 불확실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전에서는 “자신과 대립한다”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경쟁적으로 진리를 주장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가져라. 그들을 짓밟거나 비난하지 말고 도우라고 말한다.유다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는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의 주장을 의심했을 때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예수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자비를 베푸신 예가 많이 있다.예수님의 다양한 자비신약성서에서는 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그리스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모든 의심이 같지 않고, 모든 의심하는 자들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들을 향한 자비 또한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 인내심과 동정 어린 이해와 격려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권면하거나 심지어 질책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하는 자들에 대해 예수님의 다양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세례 요한마태복음 11장 2-6절에서 우리는 의심하는 자인 세례 요한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태중에 있는(눅 1:41) 요한에게 특별한 계시로(요 1:29-34)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셨다. 헤롯의 감옥에 갇혀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상당한 영적 억압을 경험했을 요한은 선구자로서 자신의 소명이 맞는지 두 번째로 의심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를 예수께 보내 묻도록 하였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예수님의 대답은 자비롭고 친절했으며, 그의 마지막 날에 요한의 믿음을 굳건히 하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마 12:20). 그분은 고통과 고립의 어둠 속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의심을 어떻게 부드럽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계신다.베드로마태복음 14장 28-33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의심을 다른 방법의 자비로 다루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폭풍우 가운데 물 위를 걷기 위해 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는 도중에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물 위를 걷지 못하는 것 말이다.!그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가라앉았다. 베드로가 소리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 14:30). 예수님은 그를 구하시고 꾸짖으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 14:31). 예수님은 베드로(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을 향한 초점이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의(그의 두려움에 나타난) 위험을 각인시키고자 하셨다. 집중적이고 끈기 있는 신앙을 요구하는 삶의 폭풍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의심을 어떻게 단호히 다룰지 알고 계셨다.도마요한복음 20장 24-29절은 예수님이 제자의 의심을 다룬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도마는 열 명의 제자들이 살아난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하였다(요 20:25). 우리는 도마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도마의 의심은 세례 요한과 베드로와는 다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도마가 알았던 사람들의 목격자적 진술을 의심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자비한 마음으로 기다리셨다. 그분은 비참하고, 외롭고, 어쩌면 두려웠을 8일이란 시간 동안 도마를 불신에 있도록 두셨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언제 그리고 얼마간 우리를 의심 속에 두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의심하는 존재냉정한 관찰자로서 의심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세 가지 예에서 묘사된 종류를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의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의심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의 자비로운 격려와 자비로운 질책, 그리고 그의 자비로운 침묵을 받았다고 믿는다.우리는 어떤 모양이든 의심을 한다. 이는 당신처럼 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생각을 하는 동시에, 오류투성이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불확실성, 오류, 그리고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무엇이 사실이고 아닌지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나는 예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내 관점이 정확하고,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곧잘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야고보가 우리에게 경고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익숙하다(야 1:6). 다른 사도들처럼 그의 경고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의심하는 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도록 한 것에 감사한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그리고 예수님이 의심하는 자들에게 보이셨던 다양한 형태의 자비에 감사한다.우리의 자비믿음의 싸움은 힘들다. 어떤 형태건 의심은 힘겨운 싸움의 일부이다. 믿음에 위협적이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 1:3)가 언제나 공격을 받고 있고, 우리를 겨냥한 “불화살”이 쏟아지고(옙 6:16) 있다. 믿는 자들은 오직 “희미하게 거울로 보고” “부분적으로” 아는 시대에 의심은 믿는 자들이 바른 방향을 설정하도록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 거울은 정말로 흐릿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자. 그들을 짓뭉개거나 비난하지 말자. 다른 의심에 대해 다양한 자비의 방식을(짓누르거나 비난하지 않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자. 그리고 조심스럽게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지키는” 이곳을 디뎌보자(유다 20-21).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ave Mercy on Those Who Doubt번역: 송유희
영성
신앙과소명
의심
긍휼
자비
격려
질책
침묵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을 돕는 네 가지 팁
by Dominique McKay
2020-02-26
그리스도인에게 직장은 부담스러운 곳일 수 있다. 능력을 인정받는 직장인이 되어야 하고, 동료들의 개인적, 영적 필요를 돌보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감당하고자 하나 일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웃에게, 좀 더 정확히 말해 직장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주신 업무도 성실하게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시도해 볼 만한 방법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정시에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도록 힘쓰라성숙한 어른이라면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맞는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시에 출근하는 것은 맡은 직책, 그리고 일하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도 정시에 출근하지 않는 직장에 다닐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정시에 출근하면 상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라고 동료들이 장난삼아 놀려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당신은 일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것이다(골 3:23–24).오늘날 많은 직장인은 일 중독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며 사무실의 불을 마지막으로 끄고 퇴근하는 이가 되려고 한다. ‘절대 그러지 말라.’항상 정시에 퇴근하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더 일찍 퇴근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당신이 업무 시간에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 혹은 동료들과 잡담하지 않고,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정한 시간이 되면 일을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일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업무가 아닌 삶의 영역에서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2. 함께 즐거워하라삶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생일, 기념일, 진급, 또는 약혼 등 기쁜 일들이 있을 때도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직장 동료들과 기쁨의 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신의 우선순위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롬 12:15). 어떤 직장이든 동료들의 진급, 생일 축하 등에 앞장서는 직원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그 일을 담당하거나,’ 그런 직원을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왜일까? 어느 직장이든 소외감을 느끼거나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은 인기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의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축하해주면 그들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직장 밖에서 하는 동료들과의 식사 등 사교 모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하여 주선하는 것이 좋다. 사무실의 스트레스나 각 개인의 가정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편하고 부담 없는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는 동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당신이 주선한 모임에 참석하든 참석하지 않든,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을 생각해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열릴 것이다. 자신을 초대하고 잊지 않았으니 말이다. 3.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라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마 5:43–45). 동료들이 겪는 어려움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면 처음에는 동정하는 마음을 갖지만 금방 잊어버리기가 쉽다.이런 경우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방법이 있다. 누군가 어려움을 나누었다면 마음속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하라. 만일 충분히 가까운 사이라면 그 사람 앞에서 함께 기도하라. 그렇게 할 수 없는 장소라면 포스트잇이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그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두고 나중에 꼭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라. 2012년 미국 대선 기간에 들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하나는 당시 후보였던 릭 샌터룸(Rick Santorum)과 릭 페리(Rick Perry)에 대한 것이었다. TV 토론 테이블에 둘러앉은 두 후보는 대통령이 된 후에 펼칠 정책들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토론을 하고 있었다. 보통 그런 토론에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봐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후보들이 직접 메모를 하곤 한다. 샌터룸이 토론 주제를 의료보험에 대한 것으로 돌리며 본인의 딸인 벨라(Bella)가 겪는 건강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토론은 끝났고, 후보들은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샌터룸이 페리가 앉았던 토론석 옆을 지나갈 때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는데, 페리가 적은 노트에 “벨라 위해서 기도하기”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기도는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가까워지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적이라도 가까워지게 한다. 매일 혹은 매주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들을 미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할수록 당신은 더욱 진실하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4. 퇴사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라“일을 정말 그만두기 전에 미리 그만두지 마라”(Don’t leave before you leave)는 2013년에 나온 인기 서적인 ‘린 인’(Lean In, 안기순 역, 와이즈베리)에서 쉐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가 한 말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자들에게 자신의 미래 목표가 무엇이든 현재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한다. 이 원칙은 현재 직장 생활 중인 그리스도인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퇴사를 생각하고 있는 직장인은 업무 생산성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그들은 동료들이 자신이 못한 일을 해줄 거라 기대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만일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동료들과 상사들은 당신이 직장을 위해 한 것은 없다고 여길 것이다. 오히려 직장이 당신을 지금까지 보호해 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라고 부르셨는데 이에 반하는 삶의 방식이다(빌 2:3–4). 퇴사가 결정되었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업무에 임하고, 회사가 인수인계 과정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후임으로 올 사람이 업무에 빨리 적응하도록 정리된 업무 인계 서류도 준비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퇴사하는가는 직장 생활을 어떻게 했는가만큼 중요하다. 당신은 퇴사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 그리스도인이 지닐 수 있는 섬기는 청지기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도미니크 맥케이(Dominique McKay)는 미상원(U.S. Senate)에서 공보관으로 일하고 있다. 2012년 Liberty University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로 줄곧 의회에서 일해왔다. 제임스 인호프(James Inhofe) 상원의원 사무실, Committee on Education, Workforce in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등에서 일했다. McLean Presbyterian Church에 출석하며 그 교회에서는 여성 사역에 관한 이사회에서 섬기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4 Practical Tips for Faithful Workplace Witness번역: 이정훈
생활
직업
일중독
동료
기도
정시
퇴사
희생
청지기
어려움
낙심될 때를 준비하라
by Lindsey Carlson
2020-02-24
남편이 목회 사역 이 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과연 목사의 부인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회의감에 빠졌다. 쉬지 않고 닥치는 시험을 거치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에, 동역자들 사이의 갈등에, 또 나의 죄성 때문에 생긴 회의감과 낙심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깨지고 상하고 또 아팠다. 그 누구도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이런 낙심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정말로 포기 직전까지 갔다. 낙심하여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중에 목사 부인들을 위한 어느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한 여자와 마주쳤다. 그 여자는 나를 몰라도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그녀의 남편은 존경받는 유명한 사람으로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낙심에 빠진 내게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박한 상황에 있던 나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에게 위안의 말 또는 격려의 말을 간절하게 요청했다. “목사 부인이라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 건가요?”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는 목사 부인인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너무도 큰 충격에 부끄러워진 나는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단지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내가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그 목사 부인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사역자 부인은 엄청난 장애물을 만나고 그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경험한다. 목사의 부인으로 한 달, 일 년, 십 년, 오십 년을 살았더라도 언젠가는 어둠의 시간을 만날 것이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이 상처를 받았든지, 누군가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이 죄 많은 세상 때문에 절망했든지 간에 그것을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속성으로 치유하는 빠른 치유법은 없다. 당신이 낙심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가장 좋은 길을 인도해주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쳐버린 목사의 아내로서 당신이 회복되려면 불평으로 가득한 입술과 절망의 말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 은혜 그리고 상처를 싸매 줄 구원이다.현실을 인정하라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남편이 목사로 사역하는 한 가정이나 공동체 간의 문제,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 등 생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또 쌀쌀맞기 이를 데 없는 행동에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남편이 가졌던 사역의 꿈이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남편의 인격이 공격받고 놀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또 남편의 사역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신실하게 사역하려고 발버둥치는 당신을 버리고 떠나는 친구의 배신을 경험할지도 모른다.이런 힘든 환경은 당신과 당신의 남편, 심지어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역자의 삶에는 교인들이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낙심하게 만드는 일이 언제라도 생길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 속에 하나님이 당신을 데려다 놓으셨다고 해도 목사의 부인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평강의 하나님이 아픈 경험을 통해 당신을 성화시킬 것과(살전 5:23) 미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지금 당신을 강하게 준비시키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롬 16:25). 도움을 구하라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도 낙심했거나 아니면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는 중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는지가 궁금하다면, 하나님이 언제 응답하실지 그 시기가 궁금하다면, 또 도와 달라는 당신의 절규에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지가 궁금하다면,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낙심한 사람의 증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런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라. 개인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무시하지 말라. 당신의 짐을 고백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겸손하게 인정하라.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인 하나님을 바라보라.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가족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또 필요하다면 성경적인 상담을 받으라.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서 믿는 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21). 인내하고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낙심의 시간에도 남편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당신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당신이 더 배우고 당당히 서도록 도울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낙심의 시간 속을 지난다고 해도 당신은 생각하는 만큼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스도가 함께 있다. 그는 낙심한 당신을 가장 불쌍하게 여긴다. 하나님, 당신의 아버지가 신실하게 당신의 절규를 듣고 있고 고난의 시간에 도와주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는 전능한 조언자이며 당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 줄 최고의 경청자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힘을 주신다.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인도하신다. 당신이 고통을 그리스도와 나눌 때 하나님은 당신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세우고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자비함으로 위로하신다. 고통은 영원한 게 아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하나님은 거기에 응답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은 구원한다. 낙심한 마음이 밤사이에 계속될지 몰라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거기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바로 그가 정한 그 시간에, 아침과 함께 기쁨이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일지 아니면 죽은 후 영광 속에서 그와 연합할 그때일지는 몰라도, 당신의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찾기 바란다. 함께 할 사람을 찾으라목사의 부인은 격려가 필요하다. 목사 부인으로 십오 년 차에 들어서는 나는 이제야 목사 부인들과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서로 이해하고, 사역의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목사 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놀라운 축복이다. 하나님께 이런 동역자 목사 부인을 달라고 기도하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학적으로 깨어있으면서 또 많은 경험을 가진 목사의 부인을 만나야 한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바로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믿음의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인내심을 위해서는 당신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 때로는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동역자의 모임을 만들라. 낙담하는 시간뿐 아니라 즐거울 때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겠다고 결심하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 될 것이다. 당신이 목사 부인이라면, 낙심의 계절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전략을 준비하고, 또 낙심의 계절에도 자신을 격려할 방법을 찾아내라. 낙심의 계절을 맞아 이미 쓰러졌다고 해도 아직 격려를 찾는 데에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당신은 그의 도움과 격려를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찾을 것이다. 목사의 부인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견딜 힘을 주실 것이고, 당신은 얼마든지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명을 잃지 않고 그를 닮아가며 성장할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포옹이 필요하다면,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Wife, Prepare for Seasons of Discouragement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낙심될때
준비하라
현실인정
도움을구하라
혼자가아니다
할사람을찾으라
믿음의사역
바울
험담일까 정보공유일까
by Brad Larson
2020-02-12
저는 사교적인 사람이며 사교성을 요하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교성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이지요. 그런데 각양각색의 사람을 대하며 하루를 보내면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는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내가 꼭 필요한 정보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내가 비밀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요청 받지 않았을 때 특히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온화하고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신뢰할 만한 경청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정보를 적절하게 나누는 것인지, 아니면 소문을 퍼뜨리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남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고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만 이런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사교적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이 위험하고 사람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행위인지 알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누군가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이야기의 당사자를 허무는 행위다. 그것은 동료를 짜증나게 하거나 상사에 대해 숙덕거리는 것처럼 뻔한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 대해 걱정거리를 말하며 고의로 그들의 결점을 드러내는 치졸하고 은밀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우리는 보통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이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의 수다는 이러한 유혹이 특히 심하게 작용한다. 나를 드러나게 하는 것과 남을 끌어내리는 것은 둘 다 나의 위치와 관련된다. 때에 따라서는 승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여기에 나오는 두 개의 명령이 직장에서의 험담이나 수다에 적용될 수 있다.1. 진실을 말하라. 참된 것만 말하라.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모습은 나를 드러내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즉 우리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진실도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 누군가의 잘못, 의심되는 동기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말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동료가 실연당한 사실을 덮고 다시는 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때는 상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얘길 꺼낼 수도 있다. 말하려는 내용이 사실이라도 그 내용을 알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우리는 진실을 너무 적게 나눌 때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거나, 사람들이 서로 공감을 나누도록 도울 수 있다면,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을 공유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야기와 정보의 나눔이 없는 직장 사무실은 외로운 곳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활동적인 공동체를 조성한다.2. 사랑 안에서 말하라. 어떤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말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날카로운 질책이나 솔직한 말이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한다.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 전에 그 정보를 나누려는 자신의 동기와 그렇게 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공감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불필요한 분열을 만들어 낼 것인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그것이 함께 웃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창피를 줄 것인가?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그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어려움을 널리 퍼뜨리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누군가 사적인 이야기를 당신에게 얘기하고 특별히 비밀을 유지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누설하지 않음으로 그 사람의 품위를 지켜주라. 만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확실하게 모르겠다면 황금률을 적용하라. ‘내 이야기라면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을까?’나는 당신이 직장 동료를 사랑하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며, 사교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충분히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인의 속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끌어내림으로 내가 우뚝 설 수 있다는 유혹을 받는 것이다. 특히 더 위대해 보이고, 더 존경을 받거나,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에 어떤 동기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감사하게도 우리 안에는 성령의 은사가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우리 안에서 거룩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신다. 성령은 결코 다른 이를 무너뜨리거나, 조롱하거나,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를 의지해야 한다.끝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가져올 수 있다. 동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준 정보를 가지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원제: Where’s the Line Between Helpful Info-Sharing and Office Goss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생활
직업
험담
사교성
소문
공유
사랑
기도
제자훈련에 상보주의가 중요한 이유
by Jonathan Leeman
2020-01-27
목회자들과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호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가 기독교 제자훈련에 있어 중요하다. 나는 상호보완주의가 성경적이라 믿는다. 이 방향으로 제자훈련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성숙한 그리스도인 남성과 성숙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교회 안에 경건한 남성상과 여성상을 보여주는 실례들이 필요하다. 셋째, 이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고 갈 목회 전략이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 세 가지 입장만 집중하여 논지를 전개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논의를 시작하는 의미에서 나의 생각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상이한 영역들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과 신학적 차별성우선 제자훈련에 대한 상호보완주의적 신학의 통찰력에서 시작해보자. 내가 섬기는 교회의 장로들은 결혼에 관련하여 예비부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준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주 되심과 그의 통치하심이 이 땅에 임하도록 함께 애써야 한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을 보면 남자와 여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행한다. 남자는 동산으로 향하나, 여자는 남자를 향하고 그를 적절하게 돕는 배필이 되도록 하셨다. 여자가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를 모두 드려 남자가 경영하는 일을 촉진하도록 하신 것이다. 반대로 남자는 여자의 은사가 최대한 발현되도록 도와서 그것이 땅에 묻혀버리지 않게 해야 한다. 한 사람이 권위를 갖는 구조적 관계인 결혼 안에 들어가 있는 남자와 여자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 안의 미혼 여성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듯 교회 안의 모든 남자에게 복종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직장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기혼 남성은 집, 교회, 직장, 또는 다른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여성들과는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남성이 젊은 남성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후배 여성에게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질문들이다. 주일학교, 소그룹, 또는 귀납적 성경공부 등에서 다룰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을 키우려면 창세기 2장이 성경의 다른 본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가정, 직장, 교회 및 공공 영역이 지닌 독특성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우리는 함께하는 신자들이 그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각기 다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남성적으로’ 그리고 ‘여성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삶의 영역: 지역 교회의 예지역 교회의 경우,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는 남성성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 남자들은 말씀을 배우고, 말씀 사역을 증진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모든 남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남자가 어디에선가는 반드시 가르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예: 각 가정에서). 행정의 은사나 관계 형성의 은사처럼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말씀 사역을 장려할 수 있도록 모든 남자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가족을 차에 태우고 가버리는 수동적인 남자들로 가득한 교회가 아닌, 말씀 사역을 촉진하기 위해 앞장서는 남자들로 가득한 교회를 상상해보라. 남자들이 이 일을 강단에서, 음악사역에서, 아이들사역에서, 예배 후 2부 순서에서, 전도사역에서, 돌봄사역에서 행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감히 말하건대 ‘바로 그런 교회’야 말로 경건한 여자들이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남자들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리더십을 행하는 일을 자주 맡게 된다는 뜻이다. 남자들이 교회라는 동산에서 씨를 뿌리고, 땅을 일구며 열심히 일하는 만큼,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그 남자들을 도우며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여자들은 존경할만한 남자들의 리더십을 따르며 이 일을 한다. 남자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영역까지 말씀 사역을 확장하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지역 교회라는 영역에서 성경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얼마나 다른 모습인지를 설명했다. 그러한 사유로 다음 세대 신자들이 지역 교회 사역에 참여하도록 제자훈련을 할 때 남녀 구별을 없애는 것은 곤란하다. 말씀 사역을 증진 시키는 일에 우리 모두 애써야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나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남자들은 리더십을 행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여자들은 조력하고, 격려하고, 도울 수 있도록 가르침 받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모든 영역에 있어서 경건한 남성성을 추구하는 남자들과 함께할 때, 여자들은 경건한 여성성을 더 잘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이 그리 하지 못한다면 이는 대부분 남자의 잘못이다.목회적 전략신학적 통찰력에서 제자훈련을 위한 목회적 전략으로 옮겨가자면, 교회 지도자들은 아이들과 청소년 프로그램에서, 남성과 여성 사역에서, 또한 교회 설교 강단에서 남녀의 성숙함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 생활의 많은 부분은 가르침으로 채워진다. 그러므로 하나씩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각 영역에 대한 당신 교회의 가르침은 남녀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가, 아니면 성경적인 남녀의 다름을 지지하는가?가르침과 함께 교회 지도자들은 양 무리 안에서 성경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좋은 사례를 찾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칭찬해야 한다. 어떤 남자들이 장로로 인정받는가? 공적인 목회 기도 중에 언급되는 여자들은 누구인가? 어떤 남자와 여자가 청소년부의 리더로 세워지는가? 상호보완주의에 대한 논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갈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성인 여성이 남자 고등학생들을 가르쳐도 되는가 하는 논의에 집착하면서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묻는다. 적합한 경계선 긋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은 마치 사귀고 있는 남녀가 “우린 스킨십을 얼마나 할 수 있지? 손잡는 것까지? 키스까지?”라고 묻는 것과 같다.그런 질문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 가운데 성경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을 세우는 것에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사귀는 남녀는 “스킨십을 어느 선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묻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서로를 더 잘 섬기고 결혼을 위한 준비를 잘 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 여자 고등학생들이 성숙한 여자로 자라고, 이 남자 고등학생들이 성숙한 남자로 자라기 위해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위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자. 성인 여성들이 남자 고등학생들을 가르쳐도 될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그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남자들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또한 교회 안의 여자 고등학생들이 교회 안의 남성 리더십을 사랑하고,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을 배워가기를 진실로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사람을 아이들 앞에 리더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신중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사랑하고 주도적으로 리더십을 실천하는 성인 남자들을 세워 청소년부 전체를 가르치도록 하고, 성숙한 여성들을 세워 그 사역을 지원하고 돕도록 할 것이다.상호보완주의, 그리고 제자훈련의 목적일반적으로 상호보완주의가 기독교 제자훈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일종의 목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남자로서, 나는 내 주위의 다른 남자들이 리더로 솔선수범하는 자가 되고, 용기를 내고, 다른 이들을 보호하며,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도록 하고자 한다. 반면 내 아내는 주위의 여성들이 지지자, 돕는 자, 조력자, 상담자, 또는 팬(fan)이 되고, 가끔은 꾸짖는 자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나는 남자들이 이 일을 교회, 가정, 그리고 가능하면 어떤 곳에서나 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내 아내는 여자들이 이 일을 교회, 가정, 그리고 가능하면 어떤 곳에서나 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더 어려운 질문은 성경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삶의 많은 영역에서는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이다. 제자훈련을 통해 이러한 본보기 사례들을 키워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상호보완주의와 복음이러한 다른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한 세계에 이러한 다른 모습을 심어놓으셨다. 왜일까? 모든 피조물이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도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사랑 안에서 복음을 그려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르치면 복음에 대한 이해도 쉬워진다. 본보기 사례들이 없으면 복음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이는 양이나 제사에 대해 전혀 배경 지식이 없는 정글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설명해야 하는 성경번역자의 딜레마 같은 것이다. 복음을 증오하는 자들이 남자나 여자의 다름을 무시하고 똑같은 것처럼 만들어서 복음을 흐릿하게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제자훈련을 상호보완주의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상호보완주의를 거부하는 인식 안에서 제자훈련을 한다면 믿음에 유익이 아닌 해가 될 것이다.출처: www.9marks.org 원제: Why Complementarianism is Crucial to Discipleship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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